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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돋보기

중소기업 간부가 본 잡셰어링의 실체

by 카푸리 2009.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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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빵을 먹어야만 하는 사람이 100명이고 빵도 100개라면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먹으면 된다. 그러나 빵은 80개고 먹어야 하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20명은 굶어야 한다. 최근 이슈로 떠오른 일자리 나누기, 일명 잡셰어링은 100명이 80개의 빵을 조각내 나눠 먹자는 것이 근본 취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 수와 빵의 개수가 동일하다고 해도 기업 CEO와 임원급 간부 10명이 50개를 먹는다. 그리고 나머지 50개를 직원 90명이 조각내서 나눠 먹어야 하는 구조다. 여기서 임원급 간부 10명이 나눠 먹는 50개의 빵 중 10%를 뗀다고 해도 고작 5개다. 임원들이 가져가고 남은 빵 50개는 90명이 나눠 먹기 때문에
파이의 크기가 원래 작다. 이 작은 크기의 파이마저 나눠 먹으라는 것이다.

지난 2월 중순, 몇몇 언론을 통해 공기업 임금 삭감과 대졸 초임 삭감 이야기가 터져 나왔고 이는 공무원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이 일과 관련해 행전안전부(행안부)는 "사실무근"이라는 답변을 내놓았지만, 각 자치단체들 별로 혹은 기관별로 '임금삭감·자진반납으로 인한 일자리 나누기'를 확산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공공기관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일자리 나누기'를 시행하자는 의견을 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사기업들의 동참을 얻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소속 30대 기업은 지난 25일경 '연봉 2600만원 이상 대졸 초임에 한해, 최대 28%를 삭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또 몇몇 대기업들은 임원의 임금을 깎아 인턴 채용을 늘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명박대통령이 “잡셰어링 방법 강구하라”고 지시한 이후 오히려 샐러리맨의 빵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많은 구직자들은 공기업 대졸초임 삭감을 반기는 듯하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지난 2월 20일부터 22일까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대졸 초임 삭감'에 대해 물은 결과 60.8%가 "긍정적"이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곧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태풍을 감지하지 못한 처사다. 지금은 '대졸 초임'이지만 이 방침이 언제, 누구에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이 상황,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경제 한파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위직
공무원들의 경우 봉급만으로 생활하기가 만만치 않다. 정부가 '공무원 봉급 현실화'라는 방안을 들고 나오기도 했지만, 말뿐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지금 경제 상황을 놓고 볼 때 안정된 직장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감지덕지다. 현재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내 친구 한 명은 '공무원 임금 자진 반납'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자진'이 아닌 '강제' 임금 삭감"이라며 볼멘소리를 했었다.

대졸초임 삭감, 이것은 교묘하게 '취업'에 목마른 대학생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다. '이태백' 신세인 그들은 '월급이 좀 적더라도 취직이나 빨리 하고 보자'고 생각할 것이다. 대졸 초임 삭감을 두고 전국대학생연합과 취업을 앞둔 사람들은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과 다름없다"며 대졸 초임 임금 삭감 방안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너무 작게 들린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대기업들이 대졸초임을 삭감하겠다는 것은 전격 발표를 하면서 이 삭감된 금액이 전체 얼마나 되고, 이 돈으로 몇 개의 일자리를 늘릴지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은 없다는 점. 대기업들이 손해날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란 걸 생각해보면 결국 사회 초년생들만 희생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전경련은 지난 2월말 30대 그룹 채용담당 임원들이 모여 대졸 초임을 최고 28%까지 삭감키로 합의했다.)

정부와 기업이 합작해 공무원 임금을 강제 삭감하고, 30대 대기업 대졸 초임을 삭감했으니 이제 다음 순서는 뭔가? 그 삭감의 회오리가 샐러리맨들에게도 닥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니 이미 진행 중인 곳도 많다. 30대 그룹 대졸초임 삭감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확산되자, 대기업들이 '임원들의 임금도 삭감하겠다'고 뒤늦게 발표했다. 자신들이 먹을 빵은 줄이지 않고, 가뜩이나 적게 먹는 사람들의 빵을 더 줄인다는 말에 배고픈 민심이 화난 것을 보고 취한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에 생색내기용으로 '그럼 우리도 빵을 좀 줄일게'라고 한 것이다. 정부든 대기업이든 '경제위기 속에 고통을 분담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없는 자들의 고통만 가중시키고 있다. 가진 자들의 고통분담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하다.

대학 졸업 후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실직을 했다. 그리고 중소기업에 취직해 다닌 지 올해로 10년째다. 월급은 대기업의 65% 수준을 받는데, 올해 월급은 이미 동결되었다. 환율 인상으로 회사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져 지난달에도 10여 명이 회사를 반강제로 떠났다.

40대 중후반인 내 나이 때는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칠 때인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 회사에서도 '일자리 나누기를 위해 임금을 삭감한다'고 하면,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할 것이다. 이번 공기업과 대기업 대졸초임 삭감과
대기업 임원 임금 삭감 등 일자리 나누기 명목 하에 진행되는 일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작아지게 만든다. 모든 기업은 아닐지라도 일부 기업들은 이를 빌미로 감원과 임금삭감을 정당화하며 진행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 회사 사정이 어려워 임금을 줄인다고 해도 반대 목소리를 낼 만큼 간 큰 직원은 아무도 없다. 아니 어쩌면 '해고' 당하지 않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경제위기를 타개한다는 명분으로 노사민정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서민, 노동자, 어린 사회초년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만 강요하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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