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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화는 무대에서 스크린까지 변신의 여왕으로 ‘한국의 마돈나’라고 불립니다. ‘무릎팍도사’ 제작진이 여러 차례 섭외를 하고 공을 들인 끝에 어렵게 출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무릎팍’에 출연해서 밝힌 나이가 무려 마흔 둘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스무살에 데뷔해 그녀가 ‘무릎팍도사’에 안고 온 고민은 ‘일 욕심이 많아서 결혼이 늦어져요’였습니다. 데뷔 후 16년간을 한결같이 가수로서, 배우로서 시대의 트렌드를 이끌었던 엄정화는 불혹을 넘긴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열정이 있었습니다.
시골소녀 엄정화의 어릴 적 꿈은 가수, 연기자였습니다. 그러나 여섯 살 때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녀는 1남 3녀 집안의 맏딸로서 가장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꿈을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가수가 되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TV에서 합창단 모집광고를 보고 지원했지만 고졸 학력 때문에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합창단원이 되려면 전문대졸 이상 학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수가 되고 싶은 엄정화의 마음을 하늘이 알고 도왔을까요? 그 이듬해 특채 모집 형태로 MBC에서 합창단 오디션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서 당당히 합격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합창단원이 됐지만 막내기 때문에 음악 프로에 출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늘 언니들 뒷바라지만 하는 것이 서러워 피아노위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두 번 음악프로에 나갔어도 엄정화의 톡톡 튀는 외모 때문에 눈에 확 띄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도왔습니다. 아시안 팝 패스티벌 코러스에 나갈 합창단원 3명을 뽑는데, 엄정화가 뽑혔고, 이 무대를 통해 엄정화만의 매력이 드러나 가수 제의를 받고 그렇게 바라던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나이가 불혹이 넘는 동안 엄정화가 가수로서, 배우로서 남겨놓은 궤적은 90년대 한국 연예 역사를 보는 듯 합니다. 그리고 엄정화 개인적으로도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성공신화를 이끈 것이어서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인간적인 매력마저 느끼게 합니다. 자신은 아직 데뷔 때 그대로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만 나이가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엄정화를 위한 말인 것 같습니다.
1993년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로 첫 영화 주연과 동시에 영화 삽입곡 ‘눈동자’로 가수로도 데뷔했습니다. 그러니까 엄정화는 요즘 아이돌 가수들이 연기, 예능 등을 병행하는 것이 유행인데, 연기와 가수를 겸업한 1세대입니다. ‘자매들’, ‘마누라 죽이기’, ‘폴리스’ 등 배우로 활동하면서 가수로도 당대 최고의 히트곡을 쏟아냈습니다. ‘배반의 장미’, ‘페스티벌’, ‘포이즌’, ‘초대’, ‘몰라’로 대박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가수로서 무대에 설 때 물찬 귀마개, 부채, 단발머리 등 패션, 메이크업, 헤어, 안무까지 엄정화가 하는 것은 모두 대박인 동시에 그 시대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배반의 장미’로 가요 무대 첫 1위를 기록했는데, 이 때 가시 돋힌 장미를 연상해 장미가시처럼 헤어스타일을 연출했습니다. 처음에는 소심하게 장미가시를 연출하다가 점점 ‘배반의 장미’가 1위로 가까워지자, 엄정화의 머리위에 돋은 가시 헤어스타일은 점점 더 날카로운 가시가 되었습니다. 이 가시머리 때문에 바쁜 스케즐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할 때 가시머리가 망가질까봐 고민하고, 대로에서 팬들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런 모습이 바로 인터넷에 떠서 ‘지못미 엄정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덕분에 ‘포이즌’, ‘초대’, ‘몰라’ 등 연이어 대박 히트곡을 내며 90년대 최고의 섹시 디바로 등극했습니다.
엄정화의 욕심은 가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배우로 자리잡게 한 영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였는데, 당시 파격적인 노출신 때문에 주변의 만류도 많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 노출신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 아픔을 엄정화는 미친 듯이 스크린에 열정을 쏟았고, 그 결과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 수상은 물론 배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아내’에서 지고지순한 아내 역할로 안티가 급증하기도 했지만 민낯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자 엄정화를 각인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짙은 화장을 한 가수 엄정화와 안방극장에서 연기자 엄정화로 1인 2역을 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이자 연기자였습니다.
이를 두고 박진영은 ‘엄정화는 감정, 눈빛, 표정, 춤에 전달력이 있는 가수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엄정화가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것 같다’고 극찬했고, 유하감독은 ‘가수를 쓴다고 주변의 반대도 심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엄정화가 머리도 좋고, 연기력도 있는 배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엄정화의 잠재력을 믿고 캐스팅했습니다. 이렇게 엄정화는 가수와 배우 양쪽에서 성공한 동시에 가수와 배우로서의 변화의 폭이 가장 큰 대한민국 연예계의 희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효리, 손담비 등 후배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불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2002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연기에 복귀하면서 이후에 ‘아내’, ‘싱글즈’, '홍반장‘, ’12월의 열대야‘, ’오로라 공주‘ 등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2006년 부산영화평론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지만 2008년 10집 <DISCO>열풍을 일으키며 가수의 길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욕심쟁이입니다.
시골소녀 엄정화의 어릴 적 꿈은 가수, 연기자였습니다. 그러나 여섯 살 때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녀는 1남 3녀 집안의 맏딸로서 가장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꿈을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가수가 되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TV에서 합창단 모집광고를 보고 지원했지만 고졸 학력 때문에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합창단원이 되려면 전문대졸 이상 학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수가 되고 싶은 엄정화의 마음을 하늘이 알고 도왔을까요? 그 이듬해 특채 모집 형태로 MBC에서 합창단 오디션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서 당당히 합격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합창단원이 됐지만 막내기 때문에 음악 프로에 출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늘 언니들 뒷바라지만 하는 것이 서러워 피아노위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두 번 음악프로에 나갔어도 엄정화의 톡톡 튀는 외모 때문에 눈에 확 띄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도왔습니다. 아시안 팝 패스티벌 코러스에 나갈 합창단원 3명을 뽑는데, 엄정화가 뽑혔고, 이 무대를 통해 엄정화만의 매력이 드러나 가수 제의를 받고 그렇게 바라던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나이가 불혹이 넘는 동안 엄정화가 가수로서, 배우로서 남겨놓은 궤적은 90년대 한국 연예 역사를 보는 듯 합니다. 그리고 엄정화 개인적으로도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성공신화를 이끈 것이어서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인간적인 매력마저 느끼게 합니다. 자신은 아직 데뷔 때 그대로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만 나이가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엄정화를 위한 말인 것 같습니다.
1993년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로 첫 영화 주연과 동시에 영화 삽입곡 ‘눈동자’로 가수로도 데뷔했습니다. 그러니까 엄정화는 요즘 아이돌 가수들이 연기, 예능 등을 병행하는 것이 유행인데, 연기와 가수를 겸업한 1세대입니다. ‘자매들’, ‘마누라 죽이기’, ‘폴리스’ 등 배우로 활동하면서 가수로도 당대 최고의 히트곡을 쏟아냈습니다. ‘배반의 장미’, ‘페스티벌’, ‘포이즌’, ‘초대’, ‘몰라’로 대박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가수로서 무대에 설 때 물찬 귀마개, 부채, 단발머리 등 패션, 메이크업, 헤어, 안무까지 엄정화가 하는 것은 모두 대박인 동시에 그 시대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배반의 장미’로 가요 무대 첫 1위를 기록했는데, 이 때 가시 돋힌 장미를 연상해 장미가시처럼 헤어스타일을 연출했습니다. 처음에는 소심하게 장미가시를 연출하다가 점점 ‘배반의 장미’가 1위로 가까워지자, 엄정화의 머리위에 돋은 가시 헤어스타일은 점점 더 날카로운 가시가 되었습니다. 이 가시머리 때문에 바쁜 스케즐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할 때 가시머리가 망가질까봐 고민하고, 대로에서 팬들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런 모습이 바로 인터넷에 떠서 ‘지못미 엄정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덕분에 ‘포이즌’, ‘초대’, ‘몰라’ 등 연이어 대박 히트곡을 내며 90년대 최고의 섹시 디바로 등극했습니다.
엄정화의 욕심은 가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배우로 자리잡게 한 영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였는데, 당시 파격적인 노출신 때문에 주변의 만류도 많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 노출신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 아픔을 엄정화는 미친 듯이 스크린에 열정을 쏟았고, 그 결과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 수상은 물론 배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아내’에서 지고지순한 아내 역할로 안티가 급증하기도 했지만 민낯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자 엄정화를 각인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짙은 화장을 한 가수 엄정화와 안방극장에서 연기자 엄정화로 1인 2역을 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이자 연기자였습니다.
이를 두고 박진영은 ‘엄정화는 감정, 눈빛, 표정, 춤에 전달력이 있는 가수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엄정화가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것 같다’고 극찬했고, 유하감독은 ‘가수를 쓴다고 주변의 반대도 심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엄정화가 머리도 좋고, 연기력도 있는 배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엄정화의 잠재력을 믿고 캐스팅했습니다. 이렇게 엄정화는 가수와 배우 양쪽에서 성공한 동시에 가수와 배우로서의 변화의 폭이 가장 큰 대한민국 연예계의 희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효리, 손담비 등 후배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불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2002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연기에 복귀하면서 이후에 ‘아내’, ‘싱글즈’, '홍반장‘, ’12월의 열대야‘, ’오로라 공주‘ 등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2006년 부산영화평론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지만 2008년 10집 <DISCO>열풍을 일으키며 가수의 길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욕심쟁이입니다.
‘어느 순간 굳이 하지 않아도 될텐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또 주위에서 자꾸 내 나이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배 연기자나 후배 가수를 위해서도 하나의 길이 되고 싶다. -엄정화-
엄정화는 여가수로서, 여배우로서 20대 초반에 데뷔해 불혹을 넘겼습니다. 서른이 넘었을 때 주변에서 발라드로 바꾸라는 제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잇값 못하고 야한 옷 입고 춤을 추는게 좀...’ 하는 시선이 많았지만 그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효리는 이런 엄정화에 대해 ‘젊은 가수들과 당당히 경쟁하는 모습에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후배들을 위해서 엄정화는 처음 가는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힘들고 외롭지만 그녀를 아끼는 팬들이 있기에 오늘도 내일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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