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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가비평

인순이, 혼혈과 편견 이긴 진정한 디바 [무릎팍]

by 카푸리 2009.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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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인순이가 부르는 ‘거위의 꿈’(카니발)을 들으면 마치 그녀의 인생 역정을 듣는 듯 합니다.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현실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가수 인순이가 1년여 동안 <무릎팍도사> 출연 요청을 고사하다가 제작진의 거듭된 설득에 마음을 돌려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습니다. 그녀가 그동안 ‘무릎팍’ 출연을 완곡히 사양한 이유는 프로그램 성격상 자신의 불우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제 인순이는 ‘무릎팍’에 나와 ‘예능에서 할 수 있는게 없어요’라는 고민을 갖고 출연해 불우한 과거사는 물론 30년 넘게 국민 디바로 활동해 온 경험들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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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는 1978년 3인조 ‘희자매’로 데뷔할 당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방송은 그녀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곱슬머리까지 문제 삼았습니다. 데뷔초에 곱슬머리를 가리기 위해 머플러를 두르거나 모자를 쓰고 나온 것은 편견의 벽을 깨기 위한 그녀만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워플한 가창력, 영혼을 적시는 듯한 목소리, 무대위 카리스마 등 멋진 노래 실력은 편견의 벽을 없애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즉, 인순이는 ‘혼혈인’이라는 이미지보다 ‘노래 잘하는 가수’로 대중들에게 각인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에 진학도 못한 채 스므살이 되던 해 가수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31년 동안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로 성공했습니다.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도 없습니다. 1999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을 마치고 워싱턴DC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노병들을 따로 초청해 공연을 한 것도 다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인순이는 참전 노병들에게 “여러분이 제 아버지입니다”라며 눈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 병원을 돌아다니며 무료공연을 하는 등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꾸준히 선행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음악에는 영혼이 있는 듯 합니다. 그녀의 음악에는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열정이 있습니다. ‘저러다 무대위에서 쓰러지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그녀는 영원한 우리 시대의 디바입니다. 무대위에서 오르면 10초도 되지 않아 관객들을 사로 잡는 가수입니다. 그녀의 노래는 립씽크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수들이 인순이 다음으로 노래부르기를 싫어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순이게 빠져드는 이유입니다. 요즘 인기 좀 끈다는 젊은 가수들 100명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그녀는 우리 가요계의 보석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런 국보급 가수에게 예술의 전당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우리 나라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이미자가 공연을 했고, 1990년대 들어서 패티김, 조용필, 신중현이 공연을 했습니다. 인순이는 2008년 세종문화회관에서는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했습니다. 카네기홀에서도 공연했는데 예술의 전당만은 그녀에게 문을 열지 않아 이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기자회견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중 데뷔초 ‘혼혈인’이라는 편견이 아직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관이 안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습니다.

인순이는 지금까지 14장의 정규앨범을 포함해 17장의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2004년, 2005년 KBS 가요대상 본상을 연거푸 수상하는 등 가수로서 각종 상을 휩쓰는 것은 물론 국민훈장 목련장(1997년)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릴적 혼혈인이라는 편견이라는 운명과 부딪히며 일찍이 세상의 벽과 마주쳤지만 항상 꿈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공뒤에 아픔과 슬럼프도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녀의 채찍이 되어준 한마디는 “너는 지는해”였습니다. 자신을 발탁하고 데뷔시켜준 김완선의 이모 한백희씨가 김완선이 조금 인기를 얻자, 인순이에게 "너(인순이)는 지는 해, 그 아이(김완선)는 뜨는 해" 라는 말을 들은후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더욱 열심히 노력했지만 쉽게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데뷔 30주년 기념공연때 한백희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순이는
자신을 데뷔시켜주고 성공시켜준 한백희씨를 위해 눈물로 노래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어제도 이 말을 하며 인순이는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만도 한데, 그녀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돼도 후배가수들과 당당히 겨루는 멋진 가수, 그녀가 100% 만족할 수 있는 공연을 하는 것이 인순이의 꿈입니다. 어떤 가수도 자기 노래에 100% 만족하는 가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꿈은 끝이 아니라 계속된다는 얘기입니다. 그 꿈을 향해가는 가수 인순이는 무대위의 카리스마는 물론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꿈을 물론 국민들에게도 꿈을 심어주는 우리 시대 진정한 디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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