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입니다. 국가 지정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은 문화재가 아주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남한산성 행궁(사적 제480호)입니다. 행궁(行宮)은 임금이 서울(한양)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합니다. 남한산성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싸웠습니다. 이런 과정은 동명 소설이나 영화로도 만들어졌죠. 이후에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나 이천 능행 길에 머물러 이용하였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으로 가는 길목 종각에 천흥사 동종이 있습니다. 종각 좌측에 안내판을 보니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각에 종을 치던 곳입니다. 조선 시대 주요 지방에는 시내 한가운데 종을 매달아주고 쳤습니다. 남한산성 종각에는 천흥사 동종이 있는데요, 동종 몸체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주조된 것으로 1천 년이 넘은 종입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은 무료지만 행궁은 유료입장입니다. 행궁 옆에 매표소가 있는데요, 어른 기준으로 2천 원입니다. 단체 성인의 경우 1,600원, (경기도민은 무료, 신분증 제시 필수) 운영 시간은 매주 화~일요일(월 휴무)입니다. 매표소에서 남한산성 팸플릿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입장권을 구입 후 가장 먼저 반겨주는 전각은 한남루(漢南樓)입니다.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이죠. 한남루는 행궁 건립 당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정조 22년(1798)에 광주 유수 흥억이 행궁 입구에 세운 2층 누문(樓門)입니다.
“...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한남루 앞부분은 물론 입장 후 뒷부분에도 주련이 있습니다. 주련(柱聯)은 기둥(柱)마다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릅니다. 한남루 안쪽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한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런 글귀와 누가 썼는지 등은 남한산성 행궁 안내판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정문 한남루를 비롯하여 외삼문, 통일신라 건물지, 하궐 남행각, 외행전, 일장각, 내행전, 좌승당, 이위정, 후원, 정전 등이 있습니다. 산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에서는 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에 가려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요,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1625년 준공 단시 70여 칸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고 그 후 방치된 채로 있다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완전히 멸실되었습니다. 그 후 1999년 남한산성 행궁터는 1차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2002년에 상궐 지역 복원공사를 완료하였습니다. 2004년에는 하궐지 발굴조사와 좌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고, 2012년 하궐 복원공사도 완료하였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시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역사와 행궁과 관련한 전시물을 볼 수 있습니다. 행궁을 축소해서 만든 모형도 볼 수 있는데요, 남한산성 행궁 방문 시 꼭 들러보세요.
전시실을 나와 중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가 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을 위한 발굴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요, 삼국사기 문무왕 때 주장성 축성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무게만 20kg에 이르는 초대형 기와를 얹은 통일신라 시대 대형건물이 있던 곳으로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기 위한 군수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건물마다 안내판이 잘 되어 있습니다.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인조 3년(1625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 142m²가 내행전 167m²보다 작고, 내행전과 비교해 6m 정도 낮은 곳에 지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었고, 청나라군이 홍이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내삼문을 지나면 내행전이 있습니다. 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입니다. 인조 2년(1624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167m²)의 건물입니다. 내행전의 기둥 외쪽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지었는데요,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고 합니다.
내행전은 내부도 들어가서 볼 수 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합니다. 왕이 집무를 보던 공간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그려진 병풍이 있습니다. 일월오봉도는 조선 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에 놓였던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병풍입니다.
내행전 오른쪽 쪽문으로 나가면 좌승당(坐勝堂)이 있습니다. 좌승당은 광주 유수의 직무 공간이었는데요, 순조 17년(1817년)에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정면 6칸, 측면 2.5칸의 규모로 건립하였습니다. ‘앉아서도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전략적 승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후원 쪽으로 나가면 소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정자 이위정(以威亭)이 나옵니다. 단순히 쉬기 위해 만든 정자가 아닙니다. 순조 17년(1817년)에 광주부 유수(지금의 군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입니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협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정자입니다.
이위정에 앉아 잠시 쉬는데 한문으로 쓴 액자가 보입니다. 안내판을 보니, 건축 당시에 지은 ‘이위정기(以威亭記)’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기문(記文)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합니다. 이위정에 김정희 글씨가 걸려 있는 겁니다.
이위정에서 보면 담장 너머로 4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좌전(左殿)입니다.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도록 행궁뿐만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모실 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마련하였습니다. 좌전은 남한산성 축성 당시에는 없었으나 산성 내에서 행궁을 건립하면서 숙종 37년(1711년)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종묘를 ‘좌전’이라 이름 붙인 것은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적을 배치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 행궁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제가 소개해 드린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만산홍엽을 뒤덮인 남한산성에 자리 잡은 행궁은 멋진 풍광을 보여주지만, 아픈 역사를 품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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