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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좋아

명필 김정희의 삶이 담긴 추사박물관

by 카푸리 202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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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신언서판'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옛날 중국에서 관리가 되려면 필요한 덕목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습니다. 신언서판은 사람을 평가할 때나 선택할 때가 되면, 첫째 인물이 잘났나 즉 신()이요, 둘째 말을 잘 할 줄 아는가 즉 언()이요, 셋째 글씨는 잘 쓰는가 즉 서(), 넷째 사물의 판단이 옳은가 즉 판() 등 네 가지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선 시대 시와 글씨, 그림에 능했던 선비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입니다. 김정희를 잠깐 소개 드리면,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 호는 추사, 완당, 노과 등 많은 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추사박물관 자료를 보면,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고, 54세에 제주에 약 9년간 유배, 다시 1년간 북청 유배 그리고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납니다.

추사가 어린 시절 서울 집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立春帖, 입춘날 그해 복을 비는 글씨를 써서 대문 또는 대들보 등에 붙이는 것)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된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그의 아버지에게 해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 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 이 예언이 맞았나요? 김정희 일생은 관리로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등 쉽지 않은 행로를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씨 하나만은 당대 최고였습니다.

김정희는 서체를 확립하지 못해 고심하다가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말년을 과천에서 보냈습니다. 김정희가 과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39세 때로, 생부인 김노경이 한성판윤으로 재직 시 과천에 과지초당을 신축하면서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부터입니다. 추사가 52세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청계산 옥녀봉 검단리에 묘를 쓰고 71세에 죽기까지 과천에서 지냈는데요, 그래서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있는 겁니다. 그럼 추사박물관과 과지초당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박물관 앞에 대형 붓 조각작품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예술혼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좌우 기둥의 여러 줄은 '붓 천 자루를, 벼루 위 두 자루의 붓은 역동적이고 힘찬 기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두 자루의 붓 가운데 한 자루의 붓은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 서예, 그림 등 학예일치(學藝一致) 정신을 기리고, 다른 한 자루의 붓은 미래에 추사와 같은 대학자 탄생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추사박물관은 총 3개층입니다. 1층은 19세기 학문의 경향, 추사 학예 교류, 추사체의 변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층은 추사의 과천 시절, 한양 시절, 제주 및 북청 유배 시절 등 추사 생애를 전시 중입니다. 1층은 추사의 작품 위주고, 2층은 추사 김정희 연표 위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지하 1층은 후지즈카 기증실과 기획전시실입니다.

티켓을 구매하니 박물관 직원이 2층부터 관람하라고 권합니다. 먼저 2층으로 가서 추사의 생애부터 봤습니다. 2층은 추사가 마주한 현실과 시대적인 변화, 추사의 인간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추사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어린 시절의 수학, 연행을 통한 새로운 문물 체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확정 등 금석학(金石學,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글과 그림을 연구하는 학문) 연구, 그리고 한양에서의 관직 생활, 제주와 함경도 북청 등 두 번의 유배생활, 말년 4년간의 과천 생활로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2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한도'입니다. 추사는 55세이던 18406월 동지부사로 정해졌으나 다음 달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았고 결국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기간은 184094일부터 1948128일까지 83개월이었습니다. 유배 기간인 1844년 여름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습니다.

세한은 논어 자한편에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데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상적은 제주 시절 중국 서적을 보내주는 등 추사에게 성심을 다한 제자입니다. 그 변치않는 마음에 보답하는 뜻으로 추사가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죠. 세한도는 현재 국보 제 180호로 손창근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보관 중입니다.

추사영정(이한철, 1857)입니다. 김정희는 18561010일 과천 과지초당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절친이던 권돈인은 이듬해 초여름 관복을 입은 추사를 이한철에게 그리게 하고 이를 예산 추사고택 뒤편에 세운 사당에 봉안했습니다. 이 영정은 19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문신 초상으로 봉황의 눈에 미간을 넓게하여 후덕한 인상을 풍깁니다.

추사의 서명은 주로 편지에 쓴 이름과 자, 그리고 수결(手決, 사인)입니다. 또 편지 봉투에 찍은 봉함인도 몇 개 남았습다. 추사는 인장을 새기는 전각에 조예가 깊었고 여러 인장을 사용했습니다. 성명인을 비롯하여 추사, 완당, 노과 등의 호, 자신의 서적 서화에 찍은 수장인, 감식을 나타낸 심정인, 유명한 시문 구절을 새긴 명구인, 바람이나 길조를 뜻하는 길상인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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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은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주제별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19세기는 북학(北學)과 연행(燕行, 사신이 죽국 북경으로 감)의 시대입니다. 북학파의 영향으로 추사가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는 과정, 청나라 학자들과의 학예 교류, 조선 금석학 연구와 여러 계층과의 교류를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고전과 글씨 연구를 통해 추사만의 독창적인 추사체를 이룩해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정희가 추사체 글씨만 잘 쓴 줄 알았는데요, 신라 시대 진흥왕이 북한산에 세운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였습니다. 김정희가 아니었다면 북한산 순수비는 그냥 평범한 바위로 훼손됐을지 모릅니다.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도 황초령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에 비각을 세우는 등 금석학에도 뛰어난 혜안을 보였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개발한 추사체가 일생 동안 여러 차례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습니다. 초년에는 종래의 조선 글씨를 따랐고 연행 뒤에는 한동안 스승 옹방강 서풍을 따랐는데요, 너무 기름지고 획에 골기가 적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뒤 또 다른 스승 완원의 필법을 바탕으로 고대 금석문 글씨의 강한 골격과 획법을 더해갔습니다.

이에 해서는 구양순 등 당나라 글씨를 따랐고, 행초는 왕희지를 바탕으로 점획에 골기를 주고 짜임을 변화롭게 하였습니다. 또 예서를 매우 즐겼는데 처음에는 삐침과 파임이 유려한 필체를 배우다가 뒤에는 고예(古隷, 전한의 예서를 후한의 팔분과 구별하여 이르는 말)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밖에 개성적 성취를 이룬 이병수, 유용 등의 청대 글씨도 널리 참고했습니다.

추사박물관을 나와 추사가 말년에 머물렀던 과지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정문 입구에 '독우물'을 재현해놓았습니다. 추가가 말년에 과지초당에 머무는 동안 직접 물을 길어 마신 독우물이라고 합니다. 독우물은 항아리를 묻어 우물을 만들었기에 '독우물' 또는 '옹정'이라고도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연못이 있고요, 연못 앞에 김정희 동상이 있습니다. 꼭 과지초당에 온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평생 10개의 벼루와 천자루의 붓을 썼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글씨는 정국 여러 곳의 현판 등으로 남아있습니다. 추사박물관과 과지초당을 가보니 순탄치 않은 삶 속에서 추사는 많은 글씨를 남겼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잖아요. 추사는 죽어서 이름뿐만 아니라 명필을 남기고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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