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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의 무덤은 능(陵)이라 해서 엄격히 관리했습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에 이른다고 하는데요, 이 가운데 능이 42기입니다. 연산군도 조선의 왕이지만 그가 묻힌 무덤은 '능'이라 하지 않고 연산군 '묘'라고 합니다.

연산군(燕山君, 1494~1506)은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였습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생모 윤 씨의 폐비문제와 관련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폐비에 찬성한 수많은 신하를 살해하기도 했죠.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폐위가 되었고 연산군으로 강봉되면서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3개월 만에 역병에 걸려 31세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연산군은 어디에 묻혔을까요? 원래 강화도에 묻혔는데요, 지금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있습니다. 14,301m2(약 4,300평)의 임야에 묘가 있습니다. 사적 제362호입니다. 왜 강화도에서 서울로 묘가 옮겨졌을까요? 원래 지금의 연산군 묘 땅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사패지(賜牌地)였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조선의 왕이었지만,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다른 왕이나 왕후의 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제가 가본 왕릉에는 신성한 장소에 세우는 홍살문이 있는데요, 연산군 묘는 없습니다. 묘지 입구에 '사적 제362호 연산군 묘'라고 표지석이 있을 뿐 입니다. 이런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다면 일반인 묘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연산군 묘역 상설도를 보니 다섯 기의 묘가 3단에 걸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일 안쪽 상단에 연산군과 부인 신씨 묘가 나란히 있고, 그 앞쪽 중단에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있으며, 제일 앞 하단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 구문경의 묘가 나란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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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상단에 있는 연산군 부부의 묘소입니다.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부인 신씨의 묘소입니다. 그냥 보통의 무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왕릉에서 보이는 병풍석(屛風石), 석마(石馬), 석양(石羊) 둥은 없습니다. 묘지 뒤에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친 담장)이 있어서 그나마 썰렁한 느낌을 지울 수 있네요.

연산군의 묘 앞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라고 다섯 글자가 새겨진 묘비가 있습니다. 후면에는 '정덕 8년 2월 20일 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연산군 묘에는 묘비(墓碑),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향로석(香爐石), 문석인(文石人), 재실(齋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연산군 부부의 묘 앞에는 죄우 2기씩, 4기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문인석(文人石)은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석상입니다.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 때는 문인석, 무인석이 있었는데요, 조선 시대에는 능 앞에 문인석만을 세웠다고 합니다.

연산군묘 맨 꼭대기에서 보니 아파트숲이 보입니다. 시야가 가려 답답해 보입니다. 연산군이 폭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초라하게 누워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연산군은 폭정을 일삼다 쫓겨난 왕인지라 묘소가 초라해 보였습니다. 최고의 성군으로 일컫는 세종대왕이 잠든 여주 영릉과 비교됐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나 대통령은 선정을 베풀어야 후세에도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제20대 대통령은 선정으로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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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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