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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좋아

조선 시대 은퇴한 관리들이 쉬던 남양풍화당

by 카푸리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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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조선 시대만 해도 평균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통계를 보니 50살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조선 시대 은퇴한 관리들이 쉬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요, 혹시 기로소(耆老所)라고 들어보셨나요? 여기서 '기로(耆老)'란 나이 70세 이상의 벼슬에서 물러난 노인(태종실록), 조선조 때 70살이 넘은 정2품 이상 문무관(단종실록),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성종실록)을 말합니다. 그 이후 70세 이상의 어르신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사용됐습니다.

기로소를 처음 들어본 분도 계실 텐데요,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로소'에 대한 검색 건수를 보면, 국역 247건, 원문 161건 등 총 408건이 나옵니다. 기로소에서 늙은 신하를 접대하는 잔치 기로연(耆老宴)도 열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경로잔치 같은 것이었죠. 이런 전통 때문인지 화성시 기로소(남양풍화당)는 현재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화성시 기로소 인근에 옛 남양도호부 관아터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행정구역 남양도호부였죠. 여기서 남양은 현재의 화성시를 말합니다. 동헌과 객사, 읍창, 관청고, 와룡루, 순교청, 별순교청, 서기청, 사용청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수도권에서 1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남양풍화당은 조선 시대 남양의 지방관아에 세워졌던 건물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세운 명예 관서인 기로소로 사용됐습니다.

남양풍화당으로 가는 길에 벽화골목이 있습니다. 남양도호부 옛터를 알리는 이정표 옆 골목을 따라 남양풍화당까지 이어집니다. 풍화당 가는 길 벽화는 2019년 화성시 마을 만들기 주민 제안 공모사업에 선정돼 7차례에 걸쳐 완성된 것이라 합니다. 마을의 자랑이죠. 주민들이 직접 힘을 합해서 만들어서 그런지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벽화작업에 참여한 마을 주민의 이름이 담벼락에 적혀 있습니다.

벽화는 600여 년 전에 있던 도호부사 행차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도호부사라고 나오는데요, 조선 시대 행정구역인 도호부를 다스리던 벼슬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화성시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풍화당 골목 벽화는 한양에서 임명된 도호부사가 처음 부임지로 가는 행렬을 실감 나게 재현했습니다. 말을 탄 도호부사와 함께 그 뒤를 하인이 따르고 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 그림도 있네요. 이곳을 방문하는 관람객을 위해 배려를 해준 주민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벽화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남양기로소(국가문화재자료 제112호)가 있습니다. 기로소 앞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는데요, 이곳을 구경 온 차들로 꽉 찼습니다. 그래서 기로소 정면 사진을 찍기 힘들었습니다. 주차 걱정을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마을 주변에 차를 세울 수 있으니 주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로소 근처에 짜장면 등 맛집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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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풍화당 대문 오른쪽에 한문으로 남양기로소(南陽耆老所)라고 쓴 현판이 있습니다. 이곳이 조선 시대 기로소였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기로소는 동네 어르신 누구나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정2품 이상 벼슬을 지낸 이들을 위한 건물입니다. 신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건물입니다. 정2품이라 하면 지금의 장관, 차관, 도지사나 광역시장, 군인으로 말하면 대장 등입니다.

붉은 벽돌로 된 기로소 담장 앞에 남양풍화당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 내용을 보니 조선 시대 철종이 재위할 당시 지어졌습니다. (철종 3년, 1852년) 남양의 유림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학문 발전과 교육 진흥을 위해 지역 주민을 교화시키는 목적으로 남양도호부 관아의 안채가 있던 자리에 세웠다고 합니다. 이곳은 원래 기로소가 아니라 남양도호부 안채였는데요, 나중에 기로소로 사용된 겁니다.

조선 시대 건물답게 한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건물에 풍화당(風化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기로소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으로 입구가 따로 있습니다. 이곳을 통해 들어가면 대문 반대편에 와룡루(臥龍樓)라는 현판도 있습니다. 용이 누워있는 집이란 뜻인데요, 고관대작들이 은퇴 후 이곳에서 누워 쉬었으니 그 모습이 용이 누운 형상이라 이런 현판을 쓴 걸까요?

기로소 건물은 한옥으로 본채와 대문채로 구성돼 있습니다. 여러 차례 보수했지만, 많이 낡았습니다. 내부에서 보면 건물은 'ㄱ'자 형태입니다. 내부는 잠겨 있어 볼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퇴직한 관리들을 위한 기로연도 열렸다고 하네요. 조선 시대 지방에 설치된 기로소는 흔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성시 남양동의 기로소가 더 특별해 보입니다.

기로소는 현재 경로당(남양풍화당 경로회), 여름에는 무더위쉼터 등으로 실제 사용 중입니다. 현판도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관람하실 때 정숙을 유지해야 합니다. 경로당 이용 시간은 13:00~18:00까지인데요, 저는 오후 3시쯤 방문해서 어르신들은 볼 수 없었습니다. 경로당 사용 시간이 지나면 문이 잠겨 있어서 안은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임금이 사패지(賜牌紙)를 내렸습니다. 임금이 공신전(功臣田)을 내려주었죠. 조선 태조가 나이 60세가 되던 1394년(태조 3)에 경로와 예우의 뜻으로 정2품 이상 문관으로서 70세 이상 된 사람의 이름을 어필로 기록한 뒤 전토와 노비·염분 등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년을 지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기로소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었으니 예우가 대단했습니다.

조선 시대 관리들은 은퇴 후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다고 합니다. 한평생 나라를 위해 봉직한 뒤 말년에 풍화당 같은 곳에서 예우를 받으면서 쉴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명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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