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과 한음 이야기 중 오성(鰲城)의 이름은 이항복(李恒福), 한음(漢陰)은 이덕형(李德馨)입니다. 두 분 다 조선 중기 문신이고요, 조선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들이죠. 오성과 한음은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오성과 한음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이덕형(1561∼1613)의 본관은 광주(廣州)로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입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 19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했는데요, 이 시험에서 이항복도 함께 급제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친하게 지냈는데요, 당시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덕형은 순조롭고 화려한 출세를 구가했습니다. 그는 이조정랑(정5품), 직제학, 부제학, 대사간(이상 정3품), 대사헌(종2품), 대제학(정2품)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덕형은 31세의 이조참판 겸 대제학(지금의 장관급)이었습니다. 이는 조선 시대 최연소 기록입니다.
이덕형은 불과 37세의 나이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1598년, 선조 31) 4월 우의정, 같은 해 10월 좌의정) 4년 뒤인 42살에 영의정(1602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덕형은 당쟁의 여파 속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1613년(광해군 5) 여름 인목대비를 폐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자 그는 이항복과 함께 강력히 반대했고, 탄핵을 받자 즉시 용진(龍津, 지금의 양평군)으로 낙향했습니다. 그리고 5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음 이덕형이 낙향에서 살던 곳이 용진 즉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입니다. 옛날 이름은 ‘사제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두물머리 위 용진강이라 불리는 북한강이 내려다보입니다. 이곳에 이덕형 선생의 별서터가 있습니다. 별서터가 뭘까요?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을 말합니다. 별장과 비슷하지만, 농사를 짓는 점이 다릅니다.
이덕형 선생 별서터는 처음 가는 곳이라 네비게이션으로 ‘이덕형 선생 별서터’라고 치니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포털 네이버에서 검색해도 찾질 못했습니다. 블로그 검색을 통해 송촌2리 마을회관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을회관으로 와서 이곳에 주차하니 안내판이 보입니다.
마을회관에서 별서터까지는 약 200여 미터 걸어가야 합니다. 자연과 경치가 좋은 곳에 그림 같은 예쁜 집들이 많습니다. 이런 곳에서 지내면 코로나19 시름과 걱정은 1도 나지 없을 듯합니다. 왜 이덕형 선생이 말년에 낙향해서 별서터를 지었는지 보지 않고도 알 것 같습니다.
별서터로 가는 좌우로 예쁜 집이 참 많습니다. 한옥을 개조한 집도 있고요. 한옥은 ‘박소재’라고 문패가 달려 있네요. 집 주변으로 벚꽃 등 봄꽃이 피고 나무들은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납니다. 한음 이덕형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이고, 산수가 좋아서 저도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 속 예쁜 집들을 구경하면서 별서터에 오니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은행나무 옆에 보호수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나무 수령이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잠시 뒤에 공개합니다.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이 아마 장관일 겁니다. 가을에 또 오고 싶네요.
은행나무 옆에 이덕형 선생 별서터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에 별서터 역사가 적형 있습니다. 이덕형 선생은 부친을 봉양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경치가 뛰어난 남양주시 조안면에 별 서인 대 야당을 지었습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이덕형 선생이 직접 심으셨다고 합니다. 선조 33년(1605)에 심으셨다니 400년이 넘었습니다. 한 그루는 한음, 또 한그루는 오성이라 여기며 다시 만나길 간절히 기원하며 심었습니다. 이 나무는 8.15 광복과 한국전쟁 때 웅~웅 하며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오래된 은행나무는 뭔가 신성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옛날 분들은 이런 곳에서 기도하곤 했죠.
이덕형 선생이 타고 다녔던 말도 있고, 그 옆에 하마터도 있습니다. 하마석은 ‘노둣돌’이라고도 합니다.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 받을 디디기 위해 세워놓은 큰 돌입니다. 말은 모형이지만요, 금방이라도 히힝~ 하면서 막 달려갈 듯합니다.
이덕형 선생의 별서터 안내판을 보니 집의 이름은 대야당이라 불렸고 ‘읍수정’과 ‘이로정’이라는 두 개의 정자를 지었습니다. 읍수(挹秀)는 주위의 빼어난 경치를 이곳에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남양주시 조안면의 풍광이 좋다는 거죠. 이로(怡老)는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을 즐기는 의미입니다. 관직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심신을 달래려고 한 거죠.
별서터의 서실 이름을 애일(愛日)이라고 한 것은 하루하루 시간을 아기고 사랑하여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이름 높은 선비들이 쓴 좋은 글을 액자에 넣어 장식했습니다. 이곳 별서는 이덕형 선생이 경관이 좋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부친을 모시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용진강 건너편 10리쯤 되는 곳에 모친의 묘소가 있어 성묘하기 쉽도록 운길산 아래 터를 잡은 것입니다. 이덕형 선생은 중국에 가서도 이곳 용진을 사랑하여 ‘아득한 천리에서 용진의 달을, 한 해에 두 곳에서 나누어 보게 되었다’라고 읊을 정도였습니다.
한음 이덕형 선생 별서터는 운길산역에서 차로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승용차로 오면 1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오면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이덕형 선생에 대해 역사도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어른들도 한적한 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음 이덕형의 별서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덕형 별서터를 방문하면서 어렸을 때 읽었던 두 사람의 일화도 생각해보고, 올바른 일을 위해서는 권력과 명예도 마다한 한음의 강직함도 생각해봤습니다. 남양주시에 가신다면 이덕형 별서터를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오성과 한음 두 사람의 우정과 당대 역사를 다시 한번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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