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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이어티

‘무릎팍’, 김연아의 자서전을 보다

by 카푸리 2010.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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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전부터 이슈와 화제를 몰고왔던 김연아의 ‘무릎팍도사’가 어제 방송됐습니다. 보통 프로그램 리뷰를 할 때 ‘무릎팍’에 ○○○가 출연했다고 하는데, 김연아의 스타성 때문인가요? 김연아의 ‘무릎팍도사’가 방송됐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촬영은 지난 4월 7일 했는데, 천안호 침몰과 MBC 파업여파로 어제 방송된 것입니다. 기다림이 컸던 만큼 방송 내용 또한 시청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김연아의 ‘무릎팍도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만 ‘김연아 자서전’이라고 할 만큼 그녀의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7살 때 처음 피겨 스케이트화를 신을 때부터 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 전무후무한 점수로 금메달을 획득하기 까지 김연아의 스물 한 살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강호동의 노련한 진행과 김연아의 ‘끼’가 더해져 김연아편 ‘무릎팍도사’는 다큐와 예능이 결합된 명품 토크쇼였습니다.


우리 국민 중에 김연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여자 선수 최초로 200점대를 돌파하고 세계 신기록만 무려 11번이나 경신했습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도무지 깨질 것 같지 않은 점수(총점 228.56점)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김연아는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세게 최고를 넘어 전설이 된 스케이터입니다. 김연아선수의 경제적 가치가 무려 5조 2천억원이라고 합니다. 정말 엄청납니다. 비록 나이는 스물 한 살이지만 그녀가 이룬 오늘의 영광은 눈물과 땀의 역사였습니다.

일곱 살 때 집 근처에 새 링크장이 생겨 우연히 언니와 링크장에 놀러갔다가 피겨에 흥미를 느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피겨 선수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국내 피겨는 그야말로 황무지였습니다. 피겨에 흥미를 느낀 김연아에게 선수로 키워보는 것이 어떠냐는 코치의 제의에 그 이후 선수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김연아는 진도가 빨라서 초등학교 6학년때 모든 점프를 완성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과 혹독한 연습으로 김연아는 어린 나이에 전국체전 등 국내 각종 피겨대회를 휩쓸며 무섭게 성장했습니다. 13세 때 첫 국제대회인 트리글라브 트로피대회 노비스 부문 우승을 하면서 14세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됐습니다. 이때부터 김연아는 전용 피겨 링크장이 없어서 태능, 과천, 잠실 등 전전하며 훈련했습니다.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연습해야 했습니다.

2004년 주니어 데뷔와 동시에 그랑프리 2차 1위로 대한민국 피겨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김연아 이름을 알린 후 지난 2006년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당시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던 일본의 신예 아사다 마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피겨계의 히딩크라고 불리는 브라이언 오셔코치가 2006년부터 김연아를 지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김연아의 경이적인 기록행진이 시작됐습니다. 김연아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며 세계 피겨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06-07시즌 그랑프리 제 4차 1위, 그랑프리 파이널 1위
07-08시즌 그랑프리 3차, 5차 1위, 그랑프리 파이널 1위
08-09시즌 4대륙 선수권 1위, 세계 선수권 1위
09-10시즌 그랑프리 파이널 1위, '10년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
* 쇼트 5번, 프리 3번, 총점 3번 등 11회 세계 신기록 경신


이렇게 화려한 기록 뒤에는 김연아의 땀과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열악한 국내 피겨 환경 때문에 연아는 외국선수보다 더 힘들게 훈련해야 했습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손으로 날을 잡고 스케이트화 끈을 묶다 보니 손에 굳은 살이 배길 정도로 힘든 시간을 무려 13년간 버텨왔습니다. 스물 한 살 김연아의 손은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손이 이 지경인데, 발은 오죽하겠습니까? 어디 이뿐인가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열악한 링크 때문에 외국 선수들에게 비해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김연아의 연습시간은 주로 밤 늦은 시간이나 새벽입니다. 실내 링크장은 보통 일반인 개장 위주기 때문에 선수들 대관시간은 이른 오전이나 늦은 밤으로 제한됩니다. 한정된 빙상장도 하키, 스피드, 쇼트트랙, 피겨 선수들이 서로 대관하려고 하다 보니 과천, 태능, 안양 등 수시로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며 연습해야 했습니다. 하키, 스피드, 피겨 선수들 각자 필요한 빙질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서로 불편했습니다.

그렇다면 외국은 어떨까요?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선수들 연습시간이 정해져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선수들 위주라 선수들 연습이 끝나면 일반인들에게 개장됩니다. 국내 링크장은 너무 추워서 두꺼운 파커옷을 입고해야 하는데, 외국은 실내 온도도 따뜻해 민소매 티를 입고 연습할 정도입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해도 아사다 마오의 전용 연습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국내 피겨 환경 속에서 김연아가 세운 기록들을 보면 기적이 아니라 그녀의 땀과 눈물인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피겨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전용 링크장이 없어 잠실의 L링크장에서 연습할 때 주변의 소란 때문에 집중이 안돼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훈련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 억울해서 울었던 겁니다. 국내 실내 빙상장은 약 30여곳입니다. 이중 피겨 스케이팅 전용 링크는 없습니다. 새벽과 밤, 추운 아이스링크에서의 반복 훈련으로 부상이 빈번했습니다.

연간 수천만원의 훈련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피겨 선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관심도 지원도 없이 홀로 이겨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피겨화가 맞지 않을 때도 슬럼프로 고생했습니다. 한 켤레에 150만원이 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피겨 여신을 포기하지 않게 했습니다. 쉴 새 없는 엉덩방아에 멍투성이가 된 다리를 이끌고 또 다시 점프를 하는 그녀의 집념과 그녀의 꿈을 지원하는 사랑하는 가족의 힘으로 다시 피겨끈을 조여 매고 또 맸습니다.


맞는 부츠가 없어서 투명 테이프로 고정해 연습해야 했고, 허리부상으로 온 몸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진통제를 먹고 시합에 나갔습니다. 김연아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고생한 사람은 김연아 자신입니다. 그러나 그녀 곁에 어머니 박미희여사가 있었고, 밴쿠버 올림픽을 위해 브라이언 오셔코치도 있었습니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숙소에서 자축 파티를 열 때 브라이언 코치는 김연아와 어머니에게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했습니다. 김연아는 당시를 떠올리며 브라이언 오셔 코치와 데이비드를 생각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국적은 다르지만 친 자식 이상으로 가르쳐준 스승에게 공을 돌리는 아름다운 눈물이기도 하지만 그녀를 응원해준 우리 국민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눈물입니다.


김연아의 웃음, 그 아래 감춰진 상처 투성이의 발, 수천 번의 점프로 휘어진 발목, 수 천번의 점프로 뒤틀린 허리, 꿈을 이루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독하게 조련해왔는지를 떠올려보니 그녀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 것 같습니다. 김연아는 다시 7살로 돌아가더라도 피겨 를 선택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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