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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좋아

경기 남양주시 한음 이덕형 선생 별서터

by 카푸리 202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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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 <오성과 한음>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두 사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데요,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두 사람 중 한음 이덕형 선생의 별서터가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데요, 그가 왜 말년을 남양주에 와서 보냈는지 함께 가서 확인해 보실까요.

한음 이덕형 선생 별서터는 송촌2리 마을회관 뒤에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이덕형 선생 별서터라고 치면 나오지 않습니다. ‘송촌2리 마을회관으로 치고 그 앞에 주차한 후 약 240m 걸어가면 나옵니다. 마을회관 앞에 이덕형 선생 별서터 안내판이 있습니다.

송촌2리는 운길산을 뒤로 하고 한음 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입니다. 딸기 수확 및 장담그기 등 각종 전통 체험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큰 잔에 부어 취하도록 먹으면서, 만고영웅을 손꼽아
헤어보니, 아마도 유령 이백이 내 벗인가 하노라.”

마을회관 오른쪽에 한음 선생 시비와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덕형 선생은 공부도 잘해서 20세에 급제하고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한시도 잘 지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회관 왼쪽에는 예스러운 담장이 있습니다. 안내판을 보니 이곳은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후원하고 한국관광개발연구원이 주관한 ‘2023 경기 구석구석 관광 테마 골목 활성화 사업에서 한음골 돌담길로 선정된 마을이라고 합니다.

왜 관광 테마 골목으로 선정되었을까요? 조선 중기 명재상 이덕형 별서터가 있고, 수령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등이 수호신처럼 서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명명된 한음길은 대한민국 최초로 명명된 도로 명칭이라고 합니다.

돌담길을 따라 안으로 가보니 돌로 만든 쉼터가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쉼터 옆으로 운길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있어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겠습니다. 마을공연장 앞에 있는 펌프는 이럴 적 향수를 자극합니다.

송촌2리는 완연한 봄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트랙터로 벌써 밭갈이를 끝냈습니다. 이제 봄에 씨를 뿌리면서 가을에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하겠죠.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 이덕형 선생 별서터 쪽을 바라다본 모습입니다. 뒤로는 운길산이 있고, 앞으로는 북한강이 흐릅니다. 말년에 쉬고 싶은 곳 아닌가요?

마을회관 우측 길로 이덕형 선생 별서터로 가봅니다. 여기서 별서터란 무엇일까요?

별서(別墅)터는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을 말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은퇴 후 낙향에서 살기 위해 지은 집과 비슷합니다. 이덕형 선생은 은퇴 후 고향 양평이 아니라 남양주시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좋기에 이덕형 선생이 말년을 보냈을까요? 별서터로 가는 길목에 현대식 전원주택은 물론 오래된 한옥도 있습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 이런 곳에서 나도 말년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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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서 240m 걸어 올라오면 수종사로 올라가는 등산로 안내판이 나옵니다. 이정표 왼쪽으로 이덕형 선생 별서터가 있습니다.

별서터에는 말이 하나 있고 그 앞으로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 정자가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있듯이 지지대가 세워져 있습니다.

말이 왜 여기에 있을까요? 아마도 이덕형 선생이 타고 다니던 말이 아닐까 싶네요. 말 앞에는 하마석이 있는데요, 말에서 내릴 때 발을 딛기 위해 놓은 돌이죠.

말 뒤로 명재상이 심은 은행나무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덕형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지낼 때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습니다. 한 그루는 한음, 또 한 그루는 오성이라고 여기며 다시 만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 은행나무는 8·15 광복절과 한국전쟁 때 ~ 하며 울었다고 전해오는데요, 현재 사택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지만 노둣돌과 은행나무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남양주시 보호수로 수령이 400년이 넘었습니다. (1982년 지정)

은행나무 두 그루 사이에 이덕형 선생 별서터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에는 별서터가 어떤 곳인지와 이덕형 선생의 약력이 적혀 있습니다.

이덕형 선생은 부친을 봉양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산수가 빼어난 이곳에 별서인 대아당을 지었습니다. 선조 33(1605)년에 45세 때 일입니다. 이곳은 1611년 이덕형을 찾아온 노계 박인로가 공의 심경을 그대로 읊은 사제곡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별서터 안쪽에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정자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요, 집의 이름은 대아당이라고 불렀고, ‘읍수정이로정두 개의 정자를 지었습니다. 여기서 읍수’(挹秀)는 주위의 빼어난 경치를 이곳에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남양주시 조안면이 그만큼 풍광이 좋다는 뜻이겠죠. 제가 봐도 그러니까요.

이덕형 선생은 별서터의 서실 이름을 애일’(愛日)이라고 했는데요, 하루하루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여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뜻이라고 하니 효자셨네요. 이덕형은 중국에 가서도 이곳 용진을 사랑하여 아득한 천리에서 용진의 달을, 한 해에 두 곳에서 나누어 보게 되었다.’라고 읊을 정도로 조안면 송촌리를 사랑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덕형 선생의 별서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지금은 이덕형이 타던 말만 그곳을 지키고 있지만요, 천하제일의 명당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더 나이가 들면 이런 곳에 와서 말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조선 중기 명재상 이덕형 선생이 노후를 보내던 별서터를 찾아 남양주시의 명당을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음 이덕형 선생 별서터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635-1 67
(송촌2리 마을회관에 주차 후 도보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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