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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돋보기

MBC노무현스페셜, 남자의 눈물을 쏟게하다

by 카푸리 2009.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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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 눈물을 흘려야 진정한 사나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눈물은 태어날 때 우렁찬 눈물이요, 두 번째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눈물은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런데 <MBC스페셜>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보고 세 번째 남자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우리 시대 진정한 임금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제(10일)가 故 노무현전대통령의 49재 안장식날이었습니다. 노전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은 각계 각층에서 3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정성스럽게 배웅했습니다. 샐러리맨인지라 직접 봉하마을까지 가지 못하고 뉴스로만 그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을 뿐인데, 어제 뉴스후 방송된 MBC스페셜은 다시 한번 그분의 크신 뜻을 펼치지 못하게 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마저 느끼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사랑하는 님은 이미 떠나셨습니다.

MBC 스페셜은 크게 투신Ⅰ,Ⅱ 그리고 승부, 대통령으로 나눠 그분의 생애를 밀도있게 조명했습니다. 퇴임 2달여를 남겨두고 이미 MBC스페셜에서 ‘대통령’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었는데, 노전대통령이 서거후 그분의 생애를 다룬 다큐를 다시 제작할 줄은 제작진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9재를 맞이해 공영방송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MBC에서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 노전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스페셜을 제작해준 것에 대해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방송내용은 이미 여러차례 보도된 내용을 재편집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서 그분이 펼치려고 했던 이상 정치를 도와주지 못한 것과 그분의 자살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자책감까지 느끼며 시청했습니다. 문용옥 전 부속실장은 “지금 당장 서재에서 담배 한대 가지고 와” 하실 것 같은데, 그 소리는 영영 들리지 않습니다. 유시민 전의원이 “서거 소식을 듣고 아차 싶더라구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말한 것은 바로 필자와 같은 자책감일 것입니다.

돈이 없어 학교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힘겨운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유명한 조세담당 변호사로 인생 역전에 성공했지만 그 인기 변호사가 갑자기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인권 변호사의 가시밭길을 선택할 때는 권양숙여자조차 말렸습니다. 1981년 부림사건 변론은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시국사건 변론을 자주 맡다보니 김영삼전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됐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은 1988년 5공청문회를 통해 그의 이름 석자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3당 합당과 1995년 부산시장 낙선, 1996년 15대 국회의원 낙선 등은 그에게 지역주의 타파라는 목표를 갖게 했습니다. 1998년 종로 보궐선거에서 뜻밖의 선전으로 당선이 됐지만 2000년 민주당 소속으로서 지역적 기반이 전혀 없는 부산에서 16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김대중전대통령의 민주당 이름으로 부산에 출마한다는 것은 누가봐도 바보같은 일이었습니다. 초반 분위기가 아주 좋았지만 결과는 낙선입니다. 낙선은 했지만 부산 시민들은 노무현을 신선하게 받아들였고, 이 때 ‘노사모’가 결성되었습니다.

1992년 민주당에 국민참여 경선방식이 도입되면서 예상을 깨고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었고, 이어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후보와의 단일화 승부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둬 야당의 단일화 후보가 되었습니다. 고비때마다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결국 하나라당 이회창후보와의 대선 대결도 승리해 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다시 보면서 할수만 있다면 노전대통령이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2002년 12월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청와대 입성후에 노전대통령은 수직적 권위를 수평적 권위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등 재임 5년동안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이 되려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취임 1년만에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직무권한이 정지되는 일이 발생하는 등 재임 5년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노무현전대통령이 펼치고자 하는 이상정치에 비해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결국 노대통령은 재임 5년을 한 마디로 “좌절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좌절에 대한 책임이 노전대통령의 책임만은 아니었습니다.

퇴임후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는 것에 대해 노대통령은 뜻밖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가 대통령에 물러나서야 진정한 서민대통령, 존경할만한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봉하마을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싶었지만 검찰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재임중 정치자금 문제로 측근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밤잠을 주무시지 못하다가 금년 4월 30일 검찰 출두로 그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생채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작은 허물 하나도 부끄러워하던 바보 노무현은 결국 5월 23일 그가 태어난 곳에서 “미안해하지 마라, 원망하지도 말라~(중략)”이란 짧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안희정 전보좌관이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기에게 엄격한 사람)'라고 한 말을 생각해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힘들어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약 1시간 동안 방송된 <MBC스페셜>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보고 나니 결론은 그가 ‘바보’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보’라는 별명은 살아생전 노무현전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던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보 노무현은 성실한 사람, 아저씨같은 사람, 친구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노전대통령을 영원히 떠나보내던 날, 임금이 죽었을 때 흘리는 남자의 눈물은 당연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눈물은 커녕 조문정치 운운하며 추모 물결마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요?


봉하마을 사저의 노전대통령의 서재는 아직 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던 책의 책장은 채 덮이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전대통령은 아직 우리 곁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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