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백리 백사 이항복 역사 여행
조선시대 청백리 하면 누가 생각나시나요? 저는 황희, 맹사성, 이항복 등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이항복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 영당 등을 찾아 청백리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이항복 하면 저는 오성과 한음이 생각납니다. 오성은 이항복을 말하며, 한음은 이덕형입니다. 오성과 한음에 관한 일화는 한번 소개해드린 바가 있는데요, 한음은 경기도 양평에, 오성은 포천에 묘소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죠.
이항복 선생 묘소가 있는 유적지는 경기도 포천시인데요, 수도권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묘소가 있는 마을은 금현리 일병 너베기 마을에 있는데요, 정겨운 시골 마을입니다. 이항복 선생 기념관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백사 이항복 유적지는 안내판이 따로 없고, 기념관 앞에 점자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안내판을 보니 교육관, 관리사, 비각, 영당, 묘소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백사 이항복 기념관입니다. 한옥 1층 건물인데요, 아직 정식 개관은 하지 않았습니다. 관리인에 따르면 2024년 11월 7일(목) 개관식을 연다고 합니다. 저는 관리인 허락을 받고 기념관을 둘러봤습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이항복 선생 초상화가 반겨줍니다.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1613년 위성 공신 1등이 되어 받았던 58세 때의 초상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공신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었죠.
기념관은 이항복 선생이 걸어온 길, 그가 남긴 문집, 이덕형 선생과의 우정, 가문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개관 전이라 일부 전시물은 아직도 정비 중입니다.
백사 이항복이 걸어온 길을 보니 1556년 서울에서 출생해서 1580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그 이후 좌의정, 우의정 등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요, 눈에 띄는 관직은 1592년 이조참판에 제수된 것입니다. 이조참판은 지금으로 말하면 인사혁신처장이죠. 또한 이항복은 형조판서(법무부장관), 병조판서(국방부장관)도 역임했습니다.
이항복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호위)한 공로를 기려 받은 교서입니다. 이 교서는 오늘날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 교서로, 글씨는 당대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교서에는 이항복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교서에서 밝힌 이항복의 공적은 아래 해설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왕은 이르노라.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신하의 절개와 위대한 업적이 드러난다.” (이하 중략) 한석봉이 쓴 교서라고 하니 눈길이 한 번 더 갔습니다.
이항복은 명가의 품격을 지켜온 후손들이 많은데요, 그중 눈에 띄는 것은 10대손 이건영, 이석영 등 6형제입니다. 이석형 6형제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요,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고 신흥무관학교까지 설립한 형제들입니다.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이항복 신도비, 영당, 묘소로 가보겠습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2품 이상 관리의 치적을 적은 비인데요, 묘소로 가는 길목에 세워집니다. 안내판을 보니 이항복 신도비는 중국 황제가 선물한 운석(운남성에서 나오는 옥석)에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이 글을 짓고, 문묘에 배향되어 당대 최고학자로 칭송받는 신독재와 김집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신도비 옆에 영당이 있습니다. 영당의 ‘영(影)’은 초상화를 의미하고, ‘당(堂)’은 건물을 뜻하여, 초상화가 모셔진 곳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고위 관료뿐만 아니라, 학문적 성취나 덕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항복 선생 영당(影堂)은 관리상의 문제로 문이 잠겨져 있는데요, 담장이 낮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영당에서는 제사를 지내거나 인물의 정신과 덕목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의례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영당 옆으로 이항복 선생 묘 안내문이 있습니다. 이항복(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까지 오른 공신입니다. 광해군 때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몰아내는 데 반대하다가,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내문을 읽어본 후 묘로 올라가 봅니다. 묘는 두 개의 쌍분입니다. 묘를 정면으로 볼 때 왼쪽이 이항복 선생이, 오른쪽은 부인 안동권씨가 잠들어 있습니다. 묘 앞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묘를 언제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묘비가 세월의 풍파에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항복 선생 묘 오른쪽 10m 부근에 두 번째 부인 금성오씨 묘가 있습니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사정에 따라 부인을 여러 명 두기도 했죠.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들을 일컫는 말로 오늘날에도 공직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청백리’는 말 그대로 맑을 ‘청(淸)’과 깨끗할 ‘백(白)’, 그리고 관리 ‘리(吏)’를 합친 용어로,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고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행했던 관리들에게 붙여진 칭호였습니다.
이항복은 1580년(선조 13)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율곡 이이의 각별한 추천으로 한음 이덕형과 함께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후 예조정랑 자리에서 정여립의 난을 명쾌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였지만,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을 때 당파싸움에 휘말려 귀양살이까지 합니다. 이후 귀양에서 풀려나 36세에 도승지(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올라 임금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필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기도 했습니다.
백사 이항복은 관리로 재직하는 동안 공정하고 깨끗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인물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추구한 덕분에 ‘청백리’로 불렸습니다. 청백리는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청렴함과 올바른 공직 생활로 존경받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명칭으로, 이항복은 그 대표적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항복의 청렴성과 공정성은 공직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며, 현대의 공직자들도 이러한 전통을 본받아야 한다고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 제도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청렴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