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은퇴 관리 쉼터 기로소(耆老所)와 남양풍화당
조선시대 관리들은 은퇴 나이가 따로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계속 근무하라고 하면 근무할 수밖에 없었죠. 조선시대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은 세종대왕에게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지만, 왕의 부탁으로 계속 일했습니다. 아무리 오래 근무했어도 말년에는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쉬었을 겁니다.
조선시대에는 은퇴한 관리들이 쉬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요, 혹시 기로소(耆老所)라고 들어보셨나요? 여기서 ‘기로(耆老)’란 늙은이 ‘耆’에 늙을 ‘老’ 두 글자를 합한 것인데요, 나이 70세 이상의 벼슬에서 물러난 노인(출처 태종실록)을 말합니다. 그 이후 70세 이상의 어르신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사용됐습니다.
기로소는 조선시대 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현직에 있는 70세가 문관들이 모여서 쉬던 장소입니다. 제가 검색으로 역사를 보니 태조 3년(1394)에 창설되고, 1400년(태종 즉위년)에 제도화되었고요, 세종 10년(1428)에 기로소로 개칭하였습니다. 기로소에서 늙은 신하를 접대하는 잔치 기로연(耆老宴)도 열렸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화성시에도 기로소(현재 명칭은 남양풍화당)가 있는데요, 지금은 마을 어르신들의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양은 현재의 화성시를 말합니다. 남양풍화당은 조선시대 남양의 지방관아에 세워졌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세운 명예 관서인 기로소로 사용됐습니다.
남양풍화당은 남양기로소로도 불렸습니다. 지금도 대문 오른쪽에 한문으로 남양기로회(南陽耆老會)라고 쓴 현판이 있습니다. 이곳이 조선시대 기로소였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기로소는 동네 어르신 누구나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 기로소에 올 수 있었을까요? 당시 정2품 이상 벼슬을 지낸 이들을 위한 건물입니다. 신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건물입니다. 정2품이라 하면 지금의 장관, 차관, 도지사나 광역시장, 군인으로 말하면 대장 등입니다. 아무나 와서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고관대작들이 은퇴 후 쉬는 곳으로 사용했습니다.
남양풍화당으로 가는 길에 벽화골목이 있습니다. 남양도호부 옛터를 알리는 이정표 옆 골목을 따라 남양풍화당까지 약 100여m가 이어집니다. 골목 좌·우측으로 조선시대 관리들의 행차 모습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벽화는 600여 년 전에 있던 도호부사 행차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도호부사라고 나오는데요,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도호부를 다스리던 벼슬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화성시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풍화당 골목 벽화는 한양에서 임명된 도호부사가 처음 부임지로 가는 행렬을 실감 나게 재현했습니다. 말을 탄 도호부사와 함께 그 뒤를 하인이 따르고 있습니다. 남양도호부사로 부임해서 오면서 선정(善政)을 베풀겠다고 생각했겠죠.
풍화당 가는 길 벽화는 2019년 화성시 마을 만들기 주민 제안 공모사업에 선정돼 7차례에 걸쳐 완성된 것이라 합니다. 이 마을의 자랑이죠. 주민들이 직접 힘을 합해서 만들어서 그런지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벽화작업에 참여한 마을 주민의 이름도 담벼락에 적혀 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 그림도 있네요. 저도 아내와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방문객을 위해 배려를 해준 주민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벽화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남양풍화당(국가문화재자료 제112호)이 있습니다. 풍화당 앞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주차장이 작아서 주차 걱정을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마을 주변에 차를 세울 수 있으니 주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붉은 벽돌로 된 기로소 담장 앞에 남양풍화당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 내용을 보니 조선시대 철종이 재위할 당시 건축했습니다. (철종 3년, 1852년) 남양의 유림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학문 발전과 교육 진흥을 위해 지역 주민을 교화시키는 목적으로 남양도호부 관아의 안채가 있던 자리에 세웠다고 합니다.
현재 풍화당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고쳐 지은 것인데요, 건물에 풍화당(風化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풍화당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왼쪽에도 입구가 있습니다. 이곳을 통해 들어가면 대문 반대편에 와룡루(臥龍樓)라는 현판도 있습니다.
와룡루는 용이 누워있는 집이란 뜻인데요, 고관대작들이 은퇴 후 이곳에서 누워 쉬었으니 그 모습이 용이 누운 형상이라 이런 현판을 쓴 걸까요?
풍화당 안으로 들어가니 공사가 한창입니다. 공사 안내판을 보니 화장실 및 회의실 보수 정비공사 중인데요, 2023년 11월 22일부터 2024년 1월 20일까지 진행됩니다. 풍화당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풍화당 건물은 한옥으로 본채와 대문채로 구성돼 있습니다. 내부에서 보면 건물은 ‘ㄱ’자 형태입니다. 19세기의 전형적인 한옥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퇴직한 관리들을 위한 기로연도 열렸다고 하네요.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된 기로소는 흔치 않았다고 합니다.
풍화당은 현재 경로당(남양풍화당 경로회)으로 여름에는 무더위쉼터, 겨울에는 한파 쉼터 등으로 실제 사용 중입니다. 현판도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관람하실 때 정숙을 유지해야 합니다. 경로당 이용 시간은 13:00~18:00까지라고 합니다. 고관대작만 사용하던 조선시대와 달리 지금은 어르신 누구나 와서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 경로당 안에 어르신 두 분이 계셨습니다. TV를 보고 계셨는데요, 밖에는 영하의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데, 안에는 따뜻했습니다. 건물 내부를 보니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만큼 한옥 석가래 등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내부 벽에 남양풍화당 정비 기본계획도가 있었는데요, 남양풍화당, 대문체, 교육관, 화장실, 주차장, 역사공원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정비계획에 따라 화장실 등 정비공사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정비를 마치고 깔끔한 모습이 기대됩니다.
남양풍화당 옆에 옛 남양도호부 관아 터가 있습니다. 남양파출소 바로 옆입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남양도호부(지방행정기관)였죠. 여기서 남양은 현재의 화성시를 말합니다.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 동헌과 객사, 읍창, 관청고, 와룡루, 서기청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관청 안에 기로소가 있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은퇴 후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다고 합니다. 한평생 나라를 위해 봉직한 뒤 노후에 예우받으면서 쉴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명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화성시에 가면 남양동에 있는 남양풍화당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요?